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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그림자를 따라가다 - '호래자식'에서 발견한 우리 언어의 역사적 편견

by 검은머리한국인 2025. 4. 4.

말의 그림자를 따라가다 - '호래자식'에서 발견한 우리 언어의 역사적 편견

 

🔍 말 한마디에 담긴 시대의 편견

"부모님 건강히 살아 계시는데 제사상을 준비하는 호래자식하고 똑같다."

정치적 격변기에 한 유명 인사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 한마디가 세간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호래자식'이라니, 어감부터 좋지 않은 이 단어는 대체 어디서 온 걸까요? 사전에는 '배운 데 없이 막되게 자라 교양이나 버릇이 없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 정의되어 있지만, 이 단어 속에는 우리 역사와 문화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오늘은 '호래자식', '후레자식', '호로자식'이라 불리는 이 말의 유래를 파헤치며, 언어에 반영된 우리 사회의 편견과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려 합니다.

💬 '홀의 자식'에서 '호래자식'까지 - 단어의 변천사

언어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호래자식'이나 '후레자식'은 모두 '홀+의+자식'에서 온 말입니다. 여기서 '홀'은 '짝이 없이 혼자뿐인'이라는 뜻을 더하는 접두사죠. '홀몸', '홀시아버지', '홀어미' 등에 쓰인 그 '홀'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의 원래 의미는 뭘까요? 바로 '아비 없이 홀어미 혼자서 키운 자식'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전혀 비난받을 일이 아니지만, 가부장제가 강했던 과거에는 이것이 큰 결함으로 여겨졌습니다. 마치 외국어의 'bastard'가 처음에는 혼외자를 뜻하다가 나중에 일반적인 욕설로 변한 것과 비슷한 경로를 밟은 셈이죠.

이 단어의 발음이 다양하게 변형된 것('호래자식', '호로자식', '후레자식', '호노자식' 등)은 어쩌면 당시 사람들이 이 말을 입에 올리기 꺼려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마치 욕설을 에둘러 표현하듯, 발음을 살짝 바꿔 말한 결과로 여러 변형이 생겨난 것이죠.

📚 또 다른 가설 - '오랑캐의 자식'?

흥미롭게도 이 말의 유래에 대한 또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1928년 김동진이 쓴 <사천년간 조선이어해석>에는 이런 설명이 나옵니다.

"버릇없는 자식을 '후레자식'이라 꾸짖는다. 오랑캐는 예법이 없어서 어른을 몰라본다 하여 오랑캐 호(胡), 오랑캐 로(虜) 두 글자 음으로 '호로의 자식'인데 이를 후레자식이라 하는 것이다."

또한 정조의 어찰에 "眞胡種子(진호종자)"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참으로 오랑캐 종자다"라는 뜻입니다. 정조가 우리말 '후레자식'을 한자로 옮기면서 '호종자'라 적은 것에서, 이 말을 '오랑캐의 자식'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항범 충북대 교수와 같은 언어학자들은 이런 해석에 반대합니다. 19세기 말 <한영자전>(1897)에 이미 '홀에자식'으로 나오고, <큰사전>(1957)에는 '홀의아들'이 등장하는 것을 근거로, '후레'가 '홀에'에서 왔다는 견해를 지지합니다.

⚖️ '불효자 방지법'의 등장과 언어의 변화

2018년 국회에 '불효자 방지법'이라는 특이한 법안이 발의된 적이 있습니다. 자녀가 부모에게서 재산을 상속받고도 부양의무를 이행하지 않거나 학대하는 경우, 증여 재산을 반환하도록 하는 내용이었죠.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이 법안이 처음에는 '호로자식 방지법'이란 명칭으로 불렸다는 점입니다. 어감이 좋지 않다는 지적이 나오자 '불효자 방지법'으로 바뀌었지만, 그조차도 "효를 강제한다"는 비판에 부딪혀 아직 법으로 제정되지 않았습니다.

이 사례는 단순한 법안 이름의 변경을 넘어, 우리 사회가 과거의 언어적 편견과 어떻게 대면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비하적 의미를 담은 옛말을 현대적 맥락에서 재사용할 때 발생하는 문제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 언어에 남아있는 봉건시대의 잔재들

'호래자식', '후레자식'과 비슷한 경로를 거친 말로 '시러베자식'도 있습니다. '실없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인 이 단어는 '실(實)+없-+-의+자식'이 줄어든 형태입니다.

이런 단어들은 모두 가부장제와 신분제가 강했던 봉건시대의 흔적을 품고 있습니다. 편부모 가정의 자녀, 신분이 낮은 사람, 예법을 모르는 이방인 등을 차별하고 비하했던 당시의 사회적 편견이 언어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죠.

💭 언어가 반영하는 사회의 변화

언어는 사회의 거울입니다. '호래자식'이란 말이 이제는 원래의 의미보다 '버릇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더 많이 쓰이는 것처럼, 단어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변화합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역사적 편견의 그림자는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호로자식 방지법'이 '불효자 방지법'으로 바뀐 것처럼, 우리는 언어 사용에 있어 과거의 차별적 요소를 걷어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효를 도덕이 아닌, 법의 잣대로 판단해야 하는 요즘의 세태"를 바라보는 씁쓸함도 존재합니다.

이런 언어적 변화와 그 이면의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국어 지식을 늘리는 차원을 넘어 우리 사회의 역사와 가치관의 변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 마치며: 말의 그림자를 통해 본 우리 사회

'호래자식'이라는 한 단어의 유래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말의 그늘과 뒤안길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 말은 단순한 욕설이 아니라, 가부장제와 신분제가 강했던 시대의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언어화된 결과물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사용하는 많은 말들이 이처럼 역사적 편견의 흔적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단어들의 유래와 변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과거를 반성하고 보다 포용적인 언어문화를 만들어가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언어는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방향은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호래자식'에서 '불효자'로의 변화가 보여주듯, 우리 사회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것이겠죠.

단어 하나에 담긴 역사의 무게를 생각하며, 우리가 사용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어떤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